'노르웨이의 숲'을 3분의 1을 읽고
글을 읽다보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오늘도 그런 욕망을 느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아 티스토리를 키고 글을 쓰려고 하면, 그런 욕망은 어느새 사라져있다. 일종의 휘발성이 강한 욕망인 것이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자위행위를 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시작하려고 하면 욕망이 사라지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짧으면 몇개월, 길면 몇년 만에 나에 관한 진솔한 글을 쓰려 앉았는데 아무것도 쓰지 않고 넘어가긴 힘든 노릇이다. 그리고 사실 쓰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쓰려고 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으니, 글은 써야겠다.
그렇다면 기억을 더듬어, 나는 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고 느꼈을까, 천천히 되짚어보도록 한다. 이것은 독후감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오묘한 단계에 위치한 글이다. 일종의 '글을 쓴다'라는 행위를 통한 배설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을 거 같다.
일단 처음 든 감정은 공감이었다.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민음사 기준 판본으로 100페이지 언저리에서까지 취했던 행동이 어쩌면 나와 닮아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그런 생각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었다. 즉, 나와 와타나베는 사실 비교해보았을 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표현을 해보자면 처음에는 나의 감성적인 면모가 나와 와타나베를 일체화시켜서 글을 독해하게끔 유도했고, 그 이후에 나의 이성적인 면모가 일체화되어 있던 것을 분리해서 비교해보게끔 만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공통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지방에 있는 공립고교를 졸업한 뒤 수도에 위치한 이류 사립대에 진학해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은 것들을 배우며, 친구도 사귀지 않은채로 시간을 보낸다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한 표현에 나의 마음이 공감을 하고, 순간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내 마음속에서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또한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문학적 가치도 마음속에서 높아졌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실제로 나와 와타나베에 대한 공통점은 위에 언급했던 것이 전부다. 이런 아웃사이더적인 면모 이외에는 작중에서 표현되는 내면의 감정도, 외적인 행동들도 같은 것이 없다. 나란 인간은 굳이 따지자면 대학을 분쇄하고 싶어하고, 여자에 대한 강한 욕망을 느끼면서도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성취하지 못하고, 주위에 자살한 친구 따위는 없고, 사실 어쩌면 작중의 특공대와 더 공통점이 많을지도 모르는 인간인 것이다. 패션감각적인 차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시라도 나와 와타나베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런 점에서 일체화시켜 이 작품에서 공감이라는 감정을 발굴해냈다는 차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미적 관념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따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서양미학사'라는 책에서 대충 읽은 내용에서 얼핏 떠오른 관념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모방적 차원에서, 개개의 구체적인 요소들에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본질과 유사한 부분들을 끌어내 모아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봤다.. 라고 나는 기억을 하는데, 그러한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와타나베라는 캐릭터를 잘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나와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라도 이 밖에 와타나베라는 캐릭터에 속해있는 요소 중 일부분이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와타나베에게 공감하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는 원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높은 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이상 쓸 말이 고갈되었다. 이것은 슬프게도 집중력이 꽤나 부족하고, 그러면서도 노래를 들으며 글을 써서 집중력을 더 저하시키는 황당한 행위를 저지르고, 자신의 내면에 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런 과정에서 안좋은 감정이 분출되지 못하고 쌓여 콜링우드의 미학적 이론과 대비되는 행동을 통해 정신병을 앓게 되는 과정을 겪은 인간으로서 글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은 할 줄 알고, 회화 작품을 감상할 줄은 알고, 어떠한 텍스트를 읽을 줄은 알지만 음악을 만들지는 못하고,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고, 글을 쓰지는 못하는 인간으로서, 굉장히 불쾌하고 나 자신도 별로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비유를 하자면 먹은 것을 대변으로 배출하지 못하는, 그로 인해서 신체적인 반응으로 역류를 통해서 먹은 것을 배출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에게도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켜켜이 글을 써가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발전과 안정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며, 여러분도 그런 마음을 가져주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