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평론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를 보고

Maka! 2023. 12. 19. 22:28

 

만화 '일상'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일상이란 사실 기적의 연속일지도 모른다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현실이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보다는 별 볼 일 없는 일들 뿐이다. 인류의 대부분은 태어나서 그저 살아갈 뿐이다. 지구의 반은 의식주 확보와 생존이 목표이며, 나머지 절반도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야망을 가지지 않은 것에, '세상을 뒤흔든 열흘' 과 같은 일을 기획하고 참여하지 못해 슬퍼해야 하는 것인가? 최소한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는 루프물이다. 똑같은 인물들이 나와서 주인공의 2년 간의 생을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화마다 바뀌는 내용, 바뀌는 시선, 바뀌는 타이밍이다.

 

이 작품에서는 비일상적인 일상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처하는 상황은 흔한듯 하면서도 흔하지 않다. 아웃사이더가 되고 악우 한 명과 친해지며 이런저런 말썽을 피우는 일은 흔히 있을 법 하지만, 스케일 자체가 다른 연출이 보인다. 보통 말썽을 피운다고 해도 한 사람의 변태적인 성도착증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던지, 학교 내 비밀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잘린다던지 하는 일을 보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극적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시선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한 사람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가? 를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것이 극명히 드러나는 캐릭터는 '조가사키'이다. 조가사키는 영화 동아리의 회장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변태 그 자체로, 여자의 유방을 탐하며(극 중에서 유방을 조각해 집 벽에 잔뜩 붙여 클라이밍하는 모습을 보인다), 러브돌을 여친으로 귀중히 모시는 8학년 생이다. 머리가 안 좋은 것인지 쓸 데 없는데 쓰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학점은 바닥을 기며, 자학적 대리대리 전쟁이라는 소동에 5년 동안 엮여 자신의 밑천을 다 드러내버린 뒤 반 쯤 몰락한다.

 

조가사키는 주인공에게 큰 폐를 끼칠 때도 있고, 어떨때는 도움이 되며, 어떨 때는 그저 주인공이 사부로 모시는 사람의 친구 정도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다양한 시선의 변화에 따라 후안무치한 최악의 변태에서, 그저 괴짜 기질을 지내고 있는, 사실은 별로 친구가 많지 않은 선배. 정도로 바라볼 수 있어진다. 시선의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 크게 느끼지 않는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흔히 쓰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고 판단하는 경우는 흔하다. 작품은 루프라는 수단을 통해 그것을 거부한다. 인물의 다양한 행동을 변화하는 타이밍과 순간에 맞춰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치 파노라마와 같이 표현한다.

 

또한 루프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결국 우리의 삶은 비루할 지라도, 결과가 좋지 않을 지라도, 시시껄렁한 나날만 보낼지라도,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웃고 떠들고 때로는 화내고 슬퍼하는 것 그 자체로, 과정으로 의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 중에서 주인공은 9개의 화를 거치면서 항상 후회한다. 그래서 관대하게도 제작진들은 기회를 준다. 다른 선택을 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하지만 후회는 멈추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후회가 멈추는 것은 주인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이다. 10화에서 주인공은 다다미 넉장 반, 방안에 고립되어 내면의 망상을 기반으로 생활해나간다. 이전 화들에서 주인공을 곤경에 몰아넣고, 힘들게 만들었던 모든 인물들은 주인공과 아무런 연을 맺지 않고 주인공은 외톨이로 생활한다. 고독에서 자유를 찾고 자유를 한 껏 만끽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진정한 고립의 상태 - 다다미 넉장 반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 를 맞이하게 되면서 그 동안 자신이 누렸던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자아 수련이라는 허황된 명목으로 생활에서 남았던 것은 결국 외로움 뿐이었다.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상호교감 속에서 괴로워했던 찌질한 일상을 긍정하고 그동안 내지 못했던 용기를 내어 고립된 공간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원했던 것들을 성취하기도 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하루 만에 다 보긴 했지만, 중간에 버티기 힘들었던 부분도 존재한다. 아무래도 루프물이다 보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6-8화가 좀 괴로웠고, 9화까지는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의구심을 지니며 보았다. 하지만 10-11화를 보며, 특히 11화의 마지막 부분을 보며 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내 대학 생활에 대해서도 고찰해보았다. 분명히 두 달 간 괴롭고, 몸도 힘들었기에 그만두었다. 사실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였기에 언젠간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방 한 칸에 고립되어 매일을 칩거하는 나날보단, 세상과 부딪히며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 나는 내 삶을 긍정하고 싶다. 후회라는 건 이 작품과 너무나 안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