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중핵파)의 역사
1956년 10월 헝가리 혁명이 소련에 의해 탄압받음. 헝가리 노동자를 지지하는 반스탈린주의 운동이 시작됨.
1957년 1월 구로다 간이치와 오오타 류를 중심으로 일본 트로츠키주의자 연맹 결성.
1957년 12월 명칭을 일본 트로츠키주의자 연맹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혁공동)으로 개칭. 오오타 류 등이 중심이 된 트로츠키주의자와 반 스탈린파의 구로다 간이치, 혼다 노부요시가 중심이 된 혁명적 마르크스 주의자 그룹(RMG)가 대립.
1958년 7월 오오타 파가 혁공동에서 이탈, 일본 트로츠키주의자 동지회를 결성. (혁공동 제1차 분열)
1959년 8월 일본민주청년동맹의 정보를 경시청에 팔려고 한 것을 이유로 구로다 간이치가 혁공동에서 제명. 혼다 노부요시와 RMG 멤버도 혁공동에서 이탈. 반 제국주의와 반 스탈린주의를 기본 전략으로 내걸고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원회)가 결성. (혁공동 제2차 분열)
1960년 4월 학동(혁공동의 학생 조직)결성.
1960년 6월 안보투쟁.
1961년 3월 분열된 분트(공산주의자 동맹)의 일부가 혁공동으로 이동. 중핵파는 이 일을 가지고 신좌파가 혁명으로 통일되었다고 자찬.
1961년 4월 전학련 제17회 대회에서 헤게모니를 놓고 학동과 츠루야 연합(분트,사청동 해방파)의 충돌. 학동은 각목으로 무장.
1962년 6월 제6회 참의원 통상 선거에 구로다 간이치가 출마, 낙선.
1962년 9월 혁공동 제3회 전국위원회 총회. 사회당과 공산당을 뚫고 계급 투쟁을 전투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을 확인. 의장인 구로다, 히로시 일파와 혼다 노부요시 일파의 대립이 표면화.
1962년 10월 정치국 내에서 혼다 노부요시가 혼다 분회를 발족.
1963년 4월 구로다파가 탈당하고 혁마르파를 결성. 혼다파는 중핵파를 형성. (혁공동 제3차 분열) 중핵파는 분트, 해방파, 구조개혁파와 연합. 4파가 힘을 합쳐 전학련을 장악한 혁마르파와 맞섬.
1963년 9월 중핵파 및 연합 4파의 250명이 집회 하는 곳에 혁마르파 150명이 몰려와 각목을 무기로 싸움. (시미즈다니초 공원 난동 사건)
1964년 7월 혁마르파의 거점인 와세다 대학에 핵심파, 해방파, 구조개혁파 3파가 들어가서 돌과 각목을 무기로 싸움. (와세다 습격 사건)
전학련 제20회 대회. 장소를 점거하는 혁마르파에 대해 중핵파 130명이 대오를 만들고 돌격해 격돌.
1965년 연합 4파에서 구조개혁파가 빠진 핵심파, 해방파, 분트가 3파 연계를 형성. 한일 투쟁(한일 조약 체결 반대 투쟁)으로 학생운동의 부활이 시작됨.
1966년 혁공동 제3차 전국 대회에서 안보 분쇄, 일본 제국주의 타도의 노선을 내세움.
1967년 10월 사토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 저지 투쟁. 3파 전학련을 구성하는 중핵파는 헬멧과 각목으로 무장한 뒤 기동대와 격돌. 이 싸움에서 중핵파 학생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사망. (10.8 하네다 투쟁)
1967년 11월 2차 하네다 투쟁.
1968년 1월 미 원자력 항공 모함 엔터프라이즈 사세보 입항 저지 투쟁. 사세보시 주민의 지지를 얻음.
1968년 2월 왕자 투쟁. 시민들이 투쟁에 가세. 3월 시위에서 49명이 기지에 돌입.
1968년 10월 도내 각지에서 여러 종파가 궐기. 중핵파 부대는 미군 탱크 트럭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신주쿠역에서 투쟁. 신주쿠에서 2만명의 군중이 폭동에 참여 해 소란죄가 적용됨. (10.21 국제 반전 데이 신주쿠 폭동)
1968년 11월 도쿄, 니혼 대학 투쟁 승리 전국 학생 총궐기 대회. 니혼대학과 도쿄대학을 시작으로 전국 대학 투쟁이 고양됨.
1969년 1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 중핵파는 호켄동 사수.
1969년 4월 혼다 노부요시가 파괴 활동 방지법 위반(예비 음모)로 체포됨. 28일에는 오키나와 투쟁. 긴자에서 시가전.
1969년 6월 도의회 선거. 키타코우지 사토시가 출마, 낙선.
1969년 8월 ASPAC 분쇄 투쟁. 중핵파 학생이 타고 있던 기차 차량이 분리 됨. 전원 체포. 17-18일에는 히로시마 투쟁.
1969년 9월 교토 시계탑 투쟁.
1969년 10-11월 '제 1의 11월 결전' - '오코니와 탈환, 안보 분쇄, 일제 타도' - '일제의 아시아 침략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등의 슬로건 하에 학생과 노동자들이 무장 투쟁 궐기. 10월 21일 국제 반전 데이에 신주쿠에서 시가전, 1600명 체포. 11월 16-17일 사토 방미 저지 투쟁, 카마타에서 시가전. 2500명 체포(16일 중핵파는 오후 3시 30분 도쿄역에서 약 200여명이 집회를 벌이던 도중 이동, 시나가와 역에서 200명이 합류, 400명이 오후 4시 카마타역에 도착. 기동대와 화염병을 무기로 전투했으나 20분 만에 괴멸. 계속 해서 1-200명의 시위대가 합류했지만 결국 패배.)
1970년 4월 전국 전공투와 전국 반전, 6월 행동위원회 공동 주최의 투쟁. 데모 지역에 혁마르파 1000명이 들어가려고 했으나 입장을 저지함.(4.28 투쟁)
1970년 6월 안보 투쟁
1970년 7월 중국 청년의 규탄을 받고 자아비판을 한 뒤 '연대 전략'을 형성하고 심화 시킴. 이후 중핵파는 온갖 반 권력적인 대중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됨.(7.7 자아비판)
1970년 8월 도쿄교육대학 학생인 혁마르파의 에비하라 토시오를 호세이 대학에서 살해.(도쿄교육대학생 린치 살인 사건)
1971년 현 단계는 1969년 11월 결전에서 질적으로 한 단계 높여져 계급 투쟁을 위한 한걸음을 더 딛고 추진을 위한 '사투로의 조정기' 라고 선포.
1971년 2월 산리즈카 1차 토지 강제 수용 저지 투쟁. 3주 동안 치열한 투쟁 전개.
1971년 3월 파괴 활동 방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던 혼다 노부요시가 출소.
1971년 6월 오키나와 반환 협정 저지 투쟁. 17일에는 1969년 수준의 무력을 행사. 메이지 공원에 중핵파를 중심으로 하는 2만명의 시위대가 집회하며 공원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1시간 동안 해방구를 건설. 시위대에 섞인 적군파에 의해 폭탄도 투입된 대혼란 속에서 732명 체포.
1971년 7월 산리즈카 농민 방송탑 사수 투쟁. 다이너마이트를 사용.
1971년 8월 혁공동 대 정치 집회 - 가을 대결전 돌입을 선포. 코자 폭동, 산리즈카에서 농민 투쟁, 논섹트 폭탄 투쟁의 빈발. 이 사건들에 중핵파는 영향을 받아 "전 인민적 규모에서!"라며 호소함.
1971년 9월 산리즈카 결전 - 나리타 공항 예정지 대집행 저지 투쟁. 중핵파는 수천명을 투입. 25일에는 '천황 규탄'을 내걸고 황궁에 침입해 발연통을 투척. 4명 체포.
1971년 10월 20일에는 혁마르파의 미술 학교 학생을 요코하마 국립 대학에서 살해. 21일에는 신바시, 유라쿠에서 해방구 건설 투쟁. 210명 체포.(10.21 투쟁) 23일에는 수도권의 중핵파 거점 대학에 혁마르파가 테러.
1971년 11월 14일에는 오키나와 반환 비준 저지를 내걸고 시부야에서 기동대와 충돌, 1명 살해.(시부야 폭동 사건) 이케부쿠로에서 발생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의 충돌로 나가타 노리코가 사망. 19일에는 히비야 마츠노토 누각을 방화, 경비원을 살해.
1971년 12월 4일에는 중핵파 학생 2명이 간사이 대학에서 혁마르파에 의해 살해당함.(간사이 대학 캠퍼스 내 우치게바 살인 사건)
1973년 3월 노선 갈등으로 정치국원 타가 카즈오를 제명.
1973년 9월 부락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에서 야스타로 사와야마를 제명.
1974년 2월 6일에는 무관한 일반 학생을 '혁마르파 멤버'로 오인해 류큐 대학에서 살해.(류큐 대학 게바 오인 살인 사건)
1975년 3월 6일에는 혁마르파의 기관지 '해방' 발행 책임자를 도쿄도 시부야구 신주쿠에서 쇠파이프로 습격해 살해. 14일에는 중핵파 최고 지도자 혼다 노부요시가 가와구치시 토츠카의 아파트에서 혁마르파에게 살해당함.(중핵파 서기장의 게바 살인 사건).16일에는 중핵파가 기자회견. 혁마르파 간부인 구라다 간이치, 마츠 아키라, 토문 하지메의 '혁명적 처형'을 선포하는 등 혁마르파에게 복수를 선언. 20일에는 혁마르파의 3명이 잠복하고 있던 아라카와 구 이마무라의 아파트의 철제 사다리에 침입해 3명이 구타당하다 사망. 27일에는 혁마르파의 가와사키시 소속 공무원을 가나가와현 가와사키 시청 뒤에서 쇠파이프로 습격한 뒤 살해. 최초의 여성 사망자가 나옴.(가와사키시 여직원의 게바 살인 사건)
1975년 4월 혁마르파 치바현 위원장을 도쿄도 스미다구에 있는 다방에서 살해.
1978년 5월 5일에는 차량 기지에 있던 케이세이 전철의 AE형 전동차를 시한 발화 장치를 설치해 전소시킴.(케이세이 스카이라이너 방화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