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3. 00:11 문화 평론
12인의 성난 사람들 - 이상적인 공론장은 건설될 수 있는가?
나무위키 피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는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시청했다. 근데 사실 imdb top 250에서 5위 하는 거 말고는 뚜렷한 지표가 없다.
영화는 배심원제를 기반으로 한 법정물인데, 원래 법정물이라는게 세트가 많이 필요 없긴 하지만 이 영화는 90% 이상이 한 방 안에서 12명의 배심원들이 대화하는 것만으로 이뤄져있다. 대단한 건 그렇게 배경이 밋밋하고 더군다나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집중해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영화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속도 울렁거리고 한 번 끊고 책이나 읽다가 다시 보고 싶은 욕구가 들 때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런 생각이 안들어서 신기하다. 역시 명작은 명작..
여하튼 스토리나 감상평은 많으니까 됐고, 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을 바탕으로 영화를 해석해보고 싶다. 하버마스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논의에 참여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시하며 상호 간의 논증적인 토론 과정을 가져 보편적인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고 봤다. 이 영화는 소수의견이 다수의견, 그리고 마침내 만장일치로 수렴되는 이야기 내에서 의사소통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된 물증과 증언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공간 내의 분위기든, 개개인 발화자들의 속성이든 이상적인 의사소통 행위자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하버마스의 이론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우리는 왠만한 사항에서 자신이 이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니면, 그것이 자신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면 덮어놓고 넘어가는 경향도 있고, 토론 과정에서 소수 의견이 제대로 수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대의민주제 속에서 49대51이라고 할지라도 51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진리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선 어쩌면 자신의 삶과는 별 상관도 없는 한 불량청소년의 살인 범죄에 대한 평결에서 12명 중 단 1명만 무죄에 손을 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장일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 12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불완전한 공론장 속에서 가장 먼저 제약받는 건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의 발언권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모순 중 하나인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 - 자유로운 발언권을 행사하면 힘이 약한 집단, 또는 개인이 평등하게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정치구조적인 차원에서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대한 장악력 부족에서부터 기원하고, 이런 공론장에서는 단순히 수가 부족해서 평등이 침해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닌 권력을 얼마만큼 행사할 수 있는지이다. 만약 소수의견을 가진자가 배심원장이었다면 영화는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이 시큰둥하게 쳐다보거나 큰소리를 치며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을 심리적으로 압박해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나간다. 의견의 핵심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승부를 걸지 말자는 논리이다. 즉 무죄추정의 원칙 속에서 핵심 증언이 어긋나는 경우들이 드러나니 유죄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증거불충분 상황이다.
의사소통의 굴절 속에서도 차근 차근 증언의 모순과 증인의 특성에 기반한 신빙성의 의문 제기가 이어지고, 배심원들이 서서히 돌아서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처음에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무죄 주장을 하기 시작한 배심원도 대단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바꾼 배심원들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던지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가정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 특히 객관식처럼 정확한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확신하는 건 많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게 영화 내에서 12명의 배심원들이 모두 무죄 판결을 확정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보는게 좋으니까 보셔라. 다만 이 과정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데, 마지막까지 유죄 판결을 외치는 배심원을 다른 배심원들이 빤히 쳐다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첫 장면과 인물만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은 상황, 즉 심리적 압박을 행사하며 소수의견의 발언권을 억제하는 현상을 결국 처음에 소수의견을 가진자들도 다수의견이 되며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한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물적 요건에 사고가 좌우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하튼 영화 속에서 총체적 진실은 나오지도 않고, 소년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감독 마음속에 있거나 감독도 그것까진 생각 안했을 수도 있다. 현실은 과학 실험이 아니기에, 본 것과 들은 것을 100% 믿을 수도 없기에 더 그렇다. 탈진실 시대에 진실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과제는 하나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끊임 없이 서로의, 우리의 진실을 한 발자국씩 찾아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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