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2. 12:20 자료실
맑스주의의 세가지 원천과 세가지 구성요소
맑스주의의 세가지 원천과 세가지 구성요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칼 맑스의 가르침은 문명세계 전체에 걸쳐서 모든 부르조아 과학(공식적인 것과 자유주의적인 것 양자의 과학)의 극단적 적대감과 증오를 받았는데, 부르조아과학은 맑스주의를 일종의 ≪악성적 종파≫로 본다. 그리고 어떠한 다른 태도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어떠한 ≪비당파적≫ 사회과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방법으로 모든 공식적․자유주의적 과학은 임금노예제를 옹호한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이러한 노예제에 대해 단호한 투쟁을 선언했다. 임금노예제 사회에서 과학이 비당파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노동자의 임금이 오른 만큼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어서는 안된다고 고집해온 사용자가 자신의 고집을 선선히 꺾을 것을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순진한 발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철학의 역사와 사회과학의 역사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맑스주의에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교의, 즉 세계문명의 큰 길에서 이탈한 교의라는 의미의 ≪종파주의≫(sectarianism)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반대로 맑스의 천재성은 인류의 선두에 선 지성들이 이미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는 데 있다. 그의 교의는 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사회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들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가르침의 연속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맑스적 교의는 전지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괄적이고 조화로운 것이며 어떤 형태의 미신이나 반동 또는 부르조아적 억압의 옹호와는 궤를 달리하는 총체적 세계관을 인간에게 준다. 그것은 독일의 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즉 인간이 19세기에 만들어낸 최상의 것에 대한 정당한 계승자이다.
우리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맑스주의의 세 가지원천이며, 이 원천은 또한 그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Ⅰ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론이다. 근대사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모든 종류의 중세기적 잔재 및 제도들과 관념의 농노제에 대해 결정적 투쟁이 감행되었던 18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모든 가르침에 성실할 뿐만 아니라, 미신․일시적 유행어 등등에 대해 적대적인 유일한 철학임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적들은 항상 유물론을 ≪반박≫하고 손상시키며 비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갖가지의 철학적 관념론을 옹호했는데, 이 관념론은 언제나 어떤 방법으로든 종교를 옹호하거나 뒷받침하는 것으로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확고부동하게 철학적 유물론을 옹호했으며, 이러한 토대로부터 어떤 이탈도 대단히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거듭 설명했다. 그들의 견해는 엥겔스의 저작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반뒤링론≫(Anti - Duhring)에서 대단히 명쾌하고 완전하게 상술되어 있는데 이 저작들은 ≪공산당선언≫과 더불어 모든 계급의식화된 노동자를 위한 안내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18세기의 유물론에서 멈추지 않았다. 즉 그는 철학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철학을 독일의 고전철학, 특히 헤겔체계의 업적을 통해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헤겔체계 자체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주요 업적은 변증법, 즉 가장 완전하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포괄적인 형태로 발전된 교의였으며, 우리에게 영원히 발전하는 물질의 반영을 제공해 주는 인간인식의 상대성에 관한 교의였다. 자연과학이 이룩한 최근의 온갖 발견들 - 라듐․전자․원소의 변화 - 은 부르조아 철학의 교의가 낡은 관념론으로 ≪새로이≫ 복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맑스는 철학적 유물론을 완전히 심화․발전시켜 자연에서 인간사회로 인식의 지평을 넓혀 놓았다. 그의 사적 유물론은 과학적 사유의 영역에 일구어 놓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혼돈과 자의성이 지배했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총체적이며 조화로운 과학적 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이론은, 생산력의 발전 결과 사회생활의 한 체계로부터 더 높은 단계의 다른 체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나오는가 -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봉건제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오는가 - 를 보여준다.
인간의 인식이 인간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자연(즉 발전하는 물질)을 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적 인식(즉 그의 다양한 - 철학적․종교적 정치적 등의 - 견해와 교의)은 사회의 경제적 체계를 반영한다. 정치제도는 경제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상부구조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근대 유럽국가의 다양한 정치적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본다. 맑스의 철학은 인류, 그리고 특히 노동계급에게 강력한 인식의 도구를 제공한 완전한 철학적 유물론이다.
Ⅱ
경제적 체계는 그 위에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게 되는 토대라는 것을 인식한 맑스는 이 경제적 체계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맑스의 주요저작인 ≪자본론≫은 근대 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체제의 연구에 바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맑스 이전의 고전적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 국가들중 가장 발달된 나라인 영국에서 발전되었다.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아도는 경제체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노동가치설의 토대를 구축했다. 맑스는 그들의 작업을 더욱 진전시켰다. 즉 그는 그 이론의 근거를 제시했으며, 그것을 모순이 없도록 발전시켰다. 그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상품생산에 소비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부르조아 경제학자들이 경제를 겉으로 드러난 시물들간의 관계로 보았다면, 맑스는 그 이면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규명하였다. 상품의 교환이란 개별생산자들이 시장을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다. 화폐는 그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 개별생산자의 경제생활을 전체 경제생활로서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시킨다. 자본은 이러한 관계의 더 진전된 발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노동력은 상품이 된다. 임금노동자는 토지․공장․노동도구의 소유자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임금노동자는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비용(임금)을 벌기 위해 하루의 일정부분을 소비하며, 그가 노동하는 하루의 나머지 부분은 이윤의 원천이며 자본가계급의 부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자본가를 위해 무보수로 만들어낸다.
잉여가치의 교의는 맑스 경제이론의 초석이다.
노동자의 노동으로 창출된 자본은 소소유자를 파멸시키고 실업자군을 만들어내면서 노동자를 분쇄한다. 산업에서 대규모 생산의 승리는 즉시 분명해진다. 동일한 현상이 농업에서도 나타난다 농업 가운데서도 자본주의적 대규모 농업이 우위를 확보하며, 기계사용이 증대하고, 화폐자본에 덜미잡힌 낙후한 기술의 농민경제는 쇠퇴하고 파산하기에 이른다. 소규모 생산의 쇠퇴는 농업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쇠퇴 그 자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소규모 생산을 파괴시켜 자본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대자본가의 연합을 위한 독점적 지위를 창출하기에 이른다. 생산 그 자체는 더욱 더 사회화되지만 - 수십만 수백만의 노동자는 규칙적인 경제유기체 속에서 함께 엮어진다 - 그러나 이러한 집합적 노동생산물은 한줌밖에 안되는 자본가에 의해 전유된다. 생산의 무정부성, 공황, 치열한 시장경쟁, 그리고 다수 인구의 생존의 불안정성은 심화된다.
자본주의체제는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증대시키는 동시에 연합된 노동의 위대한 힘을 창출한다.
맑스는 맹아적 상품경제, 즉 단순교환으로부터 그 최고형태인 대규모 생산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적했다.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은 해마다 늘어나는 노동자들에게 맑스주의의 교의가 올바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전세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승리를 알려주는 전주곡일 뿐이다.
Ⅲ
봉건제가 무너지고 자유로운 자본주의사회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이 자유는 노동인민에 대한 새로운 억압 - 착취체계를 의미한다는 것이 즉시 분명해졌다. 여러 사회주의적 교의가 즉시 이러한 억압의 반영과 항의로서 출현했다. 그러나 초기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했으며 경멸했고 욕했다. 그것은 그 사회의 파괴를 꿈꾸었고, 더 나은 질서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며, 부유한 자들에게 착취의 비도덕성을 확신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는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임금노예제의 진정한 본질을 설명할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을 밝힐 수도 없었고, 또는 어떠한 사회세력이 새로운 사회를 맡아나갈 것인가를 보여줄 수도 없었다.
한편 유럽 전역, 특히 프랑스에서 봉건제․농노제의 몰락을 가져왔던 질풍노도의 혁명은 모든 발전의 기초이자 추진력인 계급투쟁을 더욱 더 명확하게 밝혀주었다.
봉건계급에 대한 정치적 자유의 어떤 단 하나의 승리도 필사적인 저항을 거치지 않고서는 달성될 수 없었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 하나도 자본주의사회의 여러 계급들 사이의 사활을 건 투쟁이 아니고서는 다소 나마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반 위에서 진전할 수 없었다.
맑스의 천재성은 세계사가 가르쳐준 교훈을 이것으로부터 연역해내고, 그 교훈을 모순없이 최초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그가 이끌어낸 결론은 계급투쟁이라는 교의이다.
인민들은 정치적으로 언제나 기만과 자기기만의 어리석은 희생물이었으며, 또한 모든 도덕적․종교적․정치적 사회적 문구, 선언, 약속 뒤에 숨겨져 있는 이런저런 계급의 이익을 포착해내는 것을 배울 때까지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개혁과 진보의 승리자는 비록 아무리 허술하고 썩어빠진 것으로 보일지라도 모든 낡은 제도가 특정 지배계급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그 자신들이 낡은 질서의 옹호자에게 언제나 농락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는 오직 한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그 사회에서 낡은 것을 잘라내고 새살을 돋게 할 힘을 만들어낼 -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처지가 그것을 보장하는 - 세력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세력들이 투쟁에 떨쳐나서도록 각성시키고 조직하는 것이다.
맑스의 철학적 유물론만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즉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온 모든 피압박계급들에게 새 길을 열어주었다. 맑스의 경제이론만이 자본주의의 일반적 체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지위를 설명해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조직은 전세계에 걸쳐, 미국에서 일본까지, 스웨덴에서 남아프리카까지 확산되어 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계급투쟁 속에서 각성․교육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부르조아사회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욱더 긴밀하게 자신의 무리들을 결속시키고 있으며, 자기의 성공을 가늠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의 세력을 단련시키고 있으며, 불가항력적으로 커나가고 있는 것이다.
≪프로스베시체니예≫ 제3호, 1913년 8월
서명 : V. L
≪프로스베시체니예≫에 실린 원본에 따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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