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7. 18:01 사회 평론
일본 신좌파의 발자취 (1) - 혁공동의 탄생과 분열
1957년. 일본 공산당의 6전협, 스탈린 비판, 헝가리 혁명 등으로 일본 공산당과 소련, 스탈린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운동가들이 드디어 트로련을 거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을 탄생시킵니다.
그러나 탄생 때부터 조직은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사이쿄 츠카사', '오오타 류' 등을 중심으로 한 제4인터내셔널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자파와, 하나는 '구로다 간이치', '혼다 노부요시' 등을 중심으로 '구로다 간이치'의 "반제국주의 반스탈린주의"이론을 기반으로 트로츠키주의를 극복하자고 주장했던 반스탈린주의자파로 조직이 구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혼다 노부요시'라는 사람은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1957년부터 구로다 간이치와 활동하기 시작한 인물입니다. 혁공동 내부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그룹(RMG)를 결성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맞섰다고 하네요.
아무튼 이렇게 조직 내부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1958년 7월. 노선 갈등으로 첫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혁공동 제1차 분열)
혁공동에 참여하기 전부터 사회당 입당전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오오타 류는 혁공동에 들어오고 나서 1958년에 제4인터내셔널 제5회 대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귀국한 뒤 다시 당시 제4인터내셔널 각국 지부가 행하고 있었던 입당 전술을 기반으로 사회당에 입당해 활동하자고 주장하다가,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도쿄학예대학과 히비야 고등학교에 있던 그룹을 이끌고 혁공동을 탈퇴해 독자적으로 "일본 트로츠키주의자 동지회", 약칭 트로동을 결성합니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59년 1월. 이번에는 운동 내부의 도덕적 문제때문에 일이 생기는데, 바로 당시에 혁공동 의장으로 있던 구로다 간이치가 연루된, 경시청 공안부에 일본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일본 민주 청년 동맹 내부의 정보를 팔아넘기려고 했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실제로 정보가 넘어가진 않았고 미수에 그쳤지만, 구로다 간이치가 아무리 스탈린주의자라고 해도 "동지"를 경찰에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부에서 큰 논란이 되었고, 이것을 촉발로 해서 내부 갈등은 강령 논쟁 등을 통해 심화되어 가다가 결국 1959년 8월에 열린 혁공동 제1회 대회에서 구로다 간이치가 "간첩행위라는 계급적 배신"으로 제명되려 하자 혼다 노부요시를 필두로 한 RMG 조직원들이 "이건 강령 논쟁을 탄압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행위다!"라고 주장하며 대회에서 퇴장하고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게 됩니다. (혁공동 제2차 분열)
이렇게 두 차례의 분열로 혁공동은 "일본 트로츠키주의자 동지회",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나뉘게 됩니다.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은 관서파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유는 구로다 간이치를 따르고 전국위원회를 차려서 나간 계열이 관동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라 그렇게 됐다고 하네요. 정작 기존의 관동지역 지도부도 구로다 간이치 계열은 아니었다지만.
어쨌든 이렇게 혁공동의 분열상을 적어봤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혁공동 내부에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자임했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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