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4. 22:25 나는 누구인가?
의식의 흐름 2023.06.14
나는 마치 내 마음속을 탐구하는 프로이트 같은 존재였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할 이론이었지만, 나의 내면과 외면을 내 나름대로 분석해봤을 때 내리는 결론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내가 받아들인 만큼의 정보와 감정을 배출하지 못해서, 그것이 신체적인 반응으로 드러나는 질병을 가진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행복이란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들어오면 배출을 해야 한다.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다. 무심코 나오는 피식대는 웃음, 때로는 폭소. 즐거움은 그런식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우울함은 좀처럼 표현할 길이 없다. 내 나이대 남자들이 얼마만큼 우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그리 쉽게 울지 않는 편이다. 다른 식의 감정표현도 크게 하지 않는다(다만 짜증은 꽤나 자주내는 편이다). 누구한테든, 순간적으로 나에게 얼마만큼의 고통을 주든 그에게 내가 겪은 만큼의 고통을 다시, 그보다 더 전가한 적은 없다고 얘기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좀 웃기지만 나름 착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신상태가 된 것이다. 라고 추측할 뿐이다. 물론 나는 내 생각보다 착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줬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다.
항우울제는 나의 식사를 도와주는데 중요한 도구이다. 마치 숟가락과 젓가락 같은 것이다. 이것이 없다고 해서 식사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불편하고 까다로우니까. 하지만 나의 감정상태를 바꾼다는 측면에서, 나의 진솔한 감정을 변화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이 약물은 이용하기 꺼려진다. 이것을 먹으면 나의 우울감을 강제적으로 없애주는데, 그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최소한 나라는 존재는 감정의 모든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와 같은 역할을 항우울제가 해주는 거 같은데, 당장은 살아가는데 편리할지 몰라도 썩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슬픔과 우울함, 결핍과 열등감이 존재한다. 그것을 나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걸 극복하고 없앤다고 해서 없애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런 존재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당장 내가 이런 글을 쓸때도 그러한, 꿉꿉한 느낌의 감정들이 많은 역할을 해주는데 말이다.
앞으로는 계속해서 떠오르는데로 글을 쓰고 싶다. 트뤼포를 흠모하는 정성일씨가 한 명언이 있다.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굳이 표현하자면 글과 사랑에 빠졌다. 비록 부족하고 조악할 지라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가기만 하는 단계를 넘어서 내가 글을 직접 쓰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도도한 생활과 도요새에 관한 명상도 훌륭한 작품이다. 이러한 한국문학을 수능특강에서 보게되어서 안타깝다. 훌륭한 작품이라는 기준은 내가 얼마나 공감하냐를 기준으로 둔다. 서울, 1964년 겨울과 티타임을 위하여,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같은 작품도 좋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를 자칭하면서 인텔리겐치아가 되고 싶은 프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집안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다. 무산계급을 동경하지만 정작 무산계급이 되고 싶지는 않다.
신경림 – 가난한 사랑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언니네 이발관 – 2002년의 시간들
우리 헤어지던 날 넌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걸었어
너의 마음 어디쯤에 이별을 반기는 마음이 있나 봐
너를 아는 정말 많은 사람 중에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널 찾는 이 없어 아무도 없어
그걸 왜 모르는 거니
사실 이제는 그누구도 볼 수없을 것만 같은 그런
슬픈 마음의 소리 난 들을 수 있어
나를 보는 너희 마음 나는 알아
그 너희 마음 나는 알아
난 가진 게 없어 나은 것도 없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니
추억이 깊을수록 생기 없는 날들이 너무나 힘들어
나를 아는 정말 많은 사람 중에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날 찾는 이 없어 아무도 없어
그래도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바람이 있다면 나도 너희들의 흔한 얘기 나누고 싶어"
나를 보는 너희 마음 나는 알아
그 너희 마음 나는 알아
난 가진 게 없어 나은 것도 없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니
“그들은 거기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왜 안 나아갈까? 노력하지 않거든. 노력하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만에 빠져 스스로를 망쳐 버리는 거야.” 왜 난 이 문장에 과거에 공감했을까. 난 천재도 아니고, 그저 노력하지 않은 잉여일 뿐인데. 과거에 내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보면 어떨때는 웃음이, 어떨때는 우울해져서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과연 좋은 것일까. 인간은 어쩌면 별 생각이 없을 때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 행복하다는게 뭔지 모른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지. 행복을 알게되면 그에 대비되는, 마치 빛과 그림자 같은 불행이라는 개념도 접하게 되는거니까.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가사와와 같은 인간은 내가 인생에서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다른 정보가 없이 그의 행적만을 알게 된다면 싫어하게 될만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슬픈 것은 그가 도쿄대 법학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속으로는 더 싫어하게 될 것이고, 그를 실제로 만난다면 겉으로는 웃으면서 대화할 것이며, 대화를 하다가 그에 대해 생각이 바뀌고 나중에 그를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될 거 같다는 점이다. 나는 와타나베와는 다른 류의, 평범하고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사람 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나보다 잘난 사람들 앞에서 내 의견을 관철하는걸 힘들어 하는가? 그건 굉장히 짜증나는 문제다. 과연 나는 이 부분을 고칠 수 있을까? 그리고 고치는 것이 과연 이득일까? 잘 모르겠지만 골이 아파진다.
사람들은 굉장히 쉽게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거짓말을 한다. 나도 그렇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아닌가? 인간에게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본성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근데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세상사람들의 증명을 받고, 내가 만나지 않는 한 아마 내 인생에서의 수많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좋은 작품이다. 일본과 한국의 문학에는 서양문학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번역이 쉬워서 그런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필력, 문학작품의 의의, 사람들의 평도 중요하다. 그러나 비슷한 문화에서, 비슷한 삶에서 도출되는 특유의 느낌이 읽힐 때의 감각을 난 서양문학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와타나베와 다르지만, 와타나베와 같은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와타나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와타나베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언젠가 다시 나를 찾아도 예전처럼 직접 가 줄 수는 없어. 그때는 너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내가 비록 읽고 있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는 남쪽으로 튀어의 우에하라 지로가,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가, 서울 1964년 겨울의 ‘나’가, 도도한 생활의 ‘나’가, 도요새에 관한 명상의 병국이 존재한다. 그들은 책에 적혀 있는 텍스트를 넘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식의 흐름 2023.06.19 (0) | 2023.06.19 |
---|---|
의식의 흐름 2023.06.17 (0) | 2023.06.18 |
의식의 흐름 2023.06.16 (0) | 2023.06.17 |
의식의 흐름 2023.06.15 (0) | 2023.06.15 |
지금당장 기후정의 시위 후기 (0) | 2021.09.25 |